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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의자왕 이후) 백강구 전투②  
노성매

 

삼국사기 신라본기와 김유신열전의 기록에는

백강구 전투는 신라 정예기병들이 선봉이 되어

백제와 왜병들을 궤멸시킨 사건이다.

 

반면 삼국사기 백제본기[=신당서의 기록],

신당서, 자치통감, 일본서기에는

당군(唐軍)을 주역으로 삼고

백강구 전투를 부각시켜

주류성 함락의 결정적인 쇄기로 박고 있다.

 

당서와, 일본서기의 기록을 우선하여,

백강구 전투와 주류성 함락 모두

당(唐)의 공적이 되어버린 서글픈 역사

 

 

신라의 주류성 공격으로 몰려든 왜군과 당군.

양군(兩軍)의 최종 목적지는 주류성이었다.

왜군은 신라군에게 포위된 주류성으로 달려가는 백제의 구원군이었고,

당군은 주류성을 포위한 신라군에게 가는 것이 목적이었다.

 

그런데 양측 모두 배로 바다를 건너왔고,

그들의 배가 비슷한 날짜에 백강구로 들어와 맞부딪침으로 일어난 돌발적인 전투였다.

당군이 왜군의 선발대보다 하루라도 먼저 백강구에 들어섰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싸움이었다.

당군의 목적은 왜와 싸우는 것이 아니라, 주류성을 에워싸고 있는 신라군과 하루라도 빨리 합류하는 것이었다.

 

일본서기에는 8월 17일 당군 170척이 왜군보다 먼저 백촌강(白村江)에 진을 쳤다고 기록하고 있다.

 바다를 건너온 당선(唐船)은 전투용이 아니라 대부분 수송선이다.

군량을 가득 싣고 있었다.

 

군량과 보급물자를 실은 배가 170척의 절반 이상이 되었을 것이다.

그 배들을 이끌고 열흘을 허비하며 27일까지 왜군을 기다렸다는 것은 기록의 오류이다.

당군이 먼저 도착해 보급선을 뒤로 빼고 왜군을 기다릴 수도 있다.

백강 일대는 백제의 영역.

그렇게 되면 주류성에서 왜군을 맞이하기 위해 백강구로 달려온 부여풍과 먼저 마주쳐야 한다.

백제왕이 전시에 단출하게 다니지는 않았을 것이고, 충분한 전투병력을 거느렸을 것이다.

 

자치통감의 기록이나,

풍왕이 전투 전에 이미 왜군과 합류해있었다는 점으로 볼 때,

왜군이 먼저 백강구에 도착했을 것이다.

싸움 양상으로 보자면 당군의 도착은 왜군의 선발대와 후발대 사이였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는 백강구 전투에 대한 기록이 없다.

신라군은 5만 대병으로 백제의 거성(巨城) 두량윤성과 왕성인 주류성을 함락하고, 자잘한 성들을 격파하면서 임존성으로 향했다.

 

문무왕은 김유신 등 28명[혹 30명]의 장군들을 거느리고,

그들과 함께 두릉윤성[혹 두량윤성]과 주류성 등 여러 성들을 쳐서 모두 항복시켰다.

부여풍은 몸을 피하여 달아나고, 왕자 충승 충지 등은 수하들과 함께 항복했다.

新羅本紀 文武王三年

王領金庾信等二十八將軍[一云三十] 與之合攻豆陵[一作良] 尹城周留城等諸城皆下之 扶餘豊脫身走 王子忠勝忠志等率其衆降

 

신라의 본진은 백강구 전투에 참여하지 않았던 것을 알 수 있다.

 

김유신열전과 당서의 기록에는 문무왕이 웅진으로 와서 유인원의 군대와 합류하였다고 되어있으나,

기록을 모두 모아보면 실제 문무왕의 행보와 당군의 움직임이 전혀 다르다.

 

신라본기와 김유신열전에서 백강구 전투는

신라 정예기병들이 선봉이 되어 백제와 왜병들을 궤멸시킨 사건이다.

반면 신당서, 자치통감, 일본서기에는

당군을 주역으로 만들고 백강구 전투를 부각시켜 주류성 함락의 결정적인 쇄기로 박고 있다.

그런데 신당서와 자치통감, 일본서기의 기록을 우선시하다보니,

백강구 전투와 주류성 함락 모두 당(唐)의 공적으로 탈바꿈된 서글픈 역사의 한 장면이다.

 

그럼 삼국사기, 신당서, 일본서기, 자치통감의 기록을 종합하여 백강구 전투의 과정을 구성해보기로 한다.

 

663년 7월 17일 신라군이 백제를 향해 왕성을 출발했다.

그리고 두량윤성을 함락시키고 8월 13일 백제의 왕성 주류성에 도착했다.

백제 풍왕은 신라군이 5만 대병을 동원하여 왕성을 치려는 것을 알고는 왜에 구원군을 요청한다.

 

663년, 천지천황 2년 8월 13일.

신라가…주류성을 치려고 도모했다.

이에 백제왕이 신라의 그러한 책략을 알고는 여러 장수들에게 말했다.

‘지금 들으니 일본의 구원군 장수 노원군신이 강병 1만여 명을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오고 있다고 한다…나는 직접 백촌으로 가서 그들을 맞아 접대하리라.’

日本書紀卷二七 天智天皇二年

秋八月壬午朔甲午 新羅…謀直入國先取州柔

於是百濟知賊所計 謂諸將曰…

今聞大日本國之救將廬原君臣率健兒萬餘 正當越海而至…我欲自往待饗白村

 

 

당에서도 손인사에게 7천 병력을 주어 백제로 파병한다.

당은 의자왕의 적통자 부여융을 앞세웠다.

부여풍에 대항할 합당한 명분이었다.

 

8월 17일경부터 신라는 주류성를 에워싸고 공격을 시작했다.

풍왕은 왜군을 맞이하기 위해 신라의 공격이 시작되기 전에 주류성을 빠져나온 듯하다.

왜군과 합세하여 신라군의 배후를 칠 의도였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의 정보망으로 보아 척후를 통해 당군의 움직임을 파악했을 가능성이 많다. 풍왕은 백강구에 도착해서야 당군의 동태를 보고받았을 것이다.

 

당군이 백제에 도착한 날짜가 언제인지는 애매하다. 그러나 8월 20일 전후일 것이다.

바다를 건너온 당군과 백제에 잔류해있던 당군이 합류했다.

그리고 함께 주류성으로 가기로 결정한다.

 

자치통감이나 삼국사기백제본기, 당서의 유인궤열전 등에는,

신라가 이미 주류성을 에워싸고 있다는 것은 완전히 무시된다.

당군(唐軍)이 주역이다.

적의 소혈인 주류성을 먼저 함락하게 되면, 다른 성들은 저절로 항복하게 될 것이다.

당군이 주류성을 제일먼저 공격해야 될 이유로 가득 찬 문장들이 열거된다.

周留賊之巢穴 群凶所聚 除惡務本 須拔其源 若克周留 則諸城自下

 

그리고 당군들은 주류성으로 가기위한 조 편성을 한다.

 

인사와 인원은 신라왕 법민과 육군을 인솔하여 진군하기로 하고,

인궤와 별장 두상, 그리고 부여융은

수군과 식량보급선을 거느리고 웅진강에서 백강으로 가서

육군과 회동하여 함께 주류성으로 나아가기로 의논했다.

於是 仁師仁願及新羅王金法敏 帥陸軍以進 仁軌乃別率杜爽扶餘隆 率水軍及糧船 自熊津江往白江 會陸軍同 趣周留城

 

그런데 문무왕은 그 시간에 주류성에서 공방전을 펼치고 있었듯이,

손인사 역시 배를 타고 그대로 백강으로 갔다.

 

663년 고종 용삭 2년 9월.

손인사(孫仁師)가 백제와 백강(白江)에서 싸웠는데, 패퇴시켰다.

 

현대 사가(史家)들은 당군의 병력을 최대 1만5천 정도로 추산한다.

KBS 역사저널에서는 1만7천으로 나온다.

손인사의 7천에, 잔류해있던 1만을 고스란히 합친 숫자다.

그러나 웅진성에서 살아남은 병사는 5천을 넘지 않았을 것으로 본다.

1만 명이 3년 동안 ‘자식을 바꾸어 서로 잡아먹을’의 최악의 조건에서 생명을 부지했고, 전투 중에 사망한 숫자도 적지 않다.

 

1만의 한병[당병]으로하여금…자식을 바꾸어 서로 잡아먹는 참혹한 지경이 없게 했다.…

당 현경 6년[611년]. 웅진의 당군 1천이 가서 공격하다가, 오히려 백제에게 격파당하여 한 명도 살아 돌아오지 못했다.

遂使一萬漢兵… 無易子而相食…

至六年…熊津漢兵一千 往打賊徒 被賊摧破 一人不歸

[신라본기 문무왕11년 답신]

 

일본서기에 의하면 당군의 배는 170척.

그들은 웅진강에서 다시 배를 타고 주류성으로 가기위해 백강으로 향했다.

백강은 웅진강의 지류.

그런데 8월 27일 웅진강과 백강의 합류지점인 백강구에서 당군은 왜군과 맞닥뜨렸다.

 

백강의 입구에서 왜병을 만나게 되어, 4번 싸워 이겼다

적의 배 4백 척을 불태우니, 화염이 하늘을 뒤덮었고, 바닷물이 온통 붉었다.

적을 크게 무너뜨리자, 부여풍은 몸을 빼 달아났다.

遇倭兵於白江之口 四戰捷 焚其舟四百艘 煙焰漲天 海水皆赤 賊眾大潰 餘豐脫身而走

[백제본기, 자치통감]

 

일본서기에는 백강구 전투가 조금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663년 8월 27일.

일본의 수군 선발대가 당의 수군과 맞부딪쳐 싸웠는데, 일본이 불리하여 물러났다. 당은 진을 견고히 하고 지켰다.

 

8월 28일.

일본의 여러 장수들과 백제왕은 그 날의 일기를 살피지도 않고 일제히 말하기를 ‘우리가 먼저 공격하면 저들은 스스로 물러날 것이다.’ 했다.

그리고 일본의 대오가 흩어진 중군을 다시 이끌고 진격하여, 견고하게 진을 치고 있는 당군을 공격했다.

당의 배들이 갑자기 좌우 양쪽으로 갈라져 왜선들을 둘러싸며 응전해왔다

순식간에 일본군이 패하기 시작했다.

물로 뛰어드는 바람에 익사하는 자가 많았으며,

뱃머리를 돌릴 수 없었다.

박시전래진은 하늘을 우러르며 맹서했다.

그리고 분기탱천하여 수십 인을 죽이고는 마침내 전사했다.

이때 백제왕 풍장은 여러 사람과 함께 배를 타고 고구려로 달아났다.

 

日本書紀卷二七天智天皇二年 八月戊申 日本船師初至者 與大唐船師合戰 日本不利而退 大唐堅陣而守

八月己酉 日本諸將與百濟王不觀氣象 而相謂之曰 我等爭先彼應自退

更率日本亂伍中軍之卒進打大唐堅陣之軍 大唐便自左右夾船繞戰

須臾之際 官軍敗績 赴水溺死者衆 艫舳不得廻旋

朴市田來津仰天而誓切齒而嗔殺數十人 於焉戰死

是時百濟王豐璋與數人乘船逃去高麗

 

8월 27일경 백강으로 들어온 왜병 선발대는, 역시 백강구에 나타난 당선(唐船)과 조우했다.

그날은 전투는 간단한 접전만으로 끝이 났다.

왜선이 먼저 후퇴하자, 당군은 물러나 수비를 견고히 했다.

 

첫날은 당군(唐軍)의 위용이 일단 압도적이었다.

웅진성에서 생사(生死)의 혈투로 단련된 유인궤의 부대가 있었고,

바다를 건너온 당군도 이미 휴식을 충분히 취한 뒤 대오가 정비되어 언제라도 싸울 준비가 끝난 상태이다. 배가 향하는 곳은 적진이었다.

그러나 왜군은 막 도착하여 휴식을 취하지 못한 상태에다 낯선 땅이었음에도, 긴장도가 떨어질 아군의 안마당 백제 땅이었다.

정신무장의 차이가 달랐다.

그럼에도 첫날 당군이 공세에 미온적이고 진영을 견고히 하고 수비에 만전을 기했던 것은, 배의 태반이 군량선. 공격보다는 수비가 안전했다.

더구나 수전(水戰)이라면 왜군이 압도적이다.

당군은 인근 주류성에 있는 신라군에게 급히 파발을 띄웠을 것이다.

다음날의 전투양상이 그것을 말해준다.

 

8월 28일. 일본서기의 기록은 여러 전투단계를 하나로 묶은 듯하다.

당군을 공격하기도 전에 이미 대오가 흐트러져있던 왜병의 주력부대.

이미 너덜너덜해진 중군이 재공격에 나설 정도면, 왜병의 좌우도 멀쩡하지 않았다는 것을 암시한다.

8월 28일의 싸움은 왜군이 위기로 몰리기까지의 과정은 생략되고,

당군의 ‘그물망 회수’ 만을 기록하고 있다.

 

8월 28일 일본서기의 기록을 보완하는 것이 신라본기 문무왕11년 답신이다.

 

이때, 왜의 수군이 와서 백제를 도왔다.

왜선 1천 척이 백강에 머물러 있고, 백제의 정예 기병들이 강 언덕에서 왜선들을 수호하고 있었다.

신라의 사납고 날랜 기병들이 당군(唐軍)의 선봉이 되어, 먼저 강 언덕의 진을 격파했다.

新羅本紀 文武王 11년. 답서

此時 倭國船兵來助百濟 倭船千艘 停在白江 百濟精騎 岸上守船 新羅驍騎 爲漢前鋒 先破岸陣

 

그리고 김유신열전의 기록 역시 신라군이 백강구 전투의 주역이었음을 말해준다.

백강구 전투에 대해서는 직접적인 언급이 없다.

그러나 신라군의 본진이 주류성에 도착한 이후,

백제의 풍왕과 왜군이 합동으로 주류성 밖에서 진을 친 곳이 백강구이다.

서술방식만 다를 뿐, 문무왕11년의 기록과 동일한 내용이다.

 

삼국사기 김유신열전.

대왕이 친히 유신, 인문, 천존, 죽지 등의 장군들을 거느리고 7월 17일 정토길에 올랐다.

웅진주에서 유인원과 만나 군사들을 합친 뒤 8월 13일에 두솔성(豆率城:주류성)에 도착했다.

백제인들과 왜인들이 밖에 진을 치고 있었다.

우리 군이 힘을 다해 싸워 대패시켰다.

백제와 왜인들이 모두 항복했다.

 

大王親率庾信仁問天存竹旨等將軍 以七月十七日征討 次熊津州 與鎭守劉仁願合兵 八月十三日 至于豆率城 百濟人與倭入出陣 我軍力戰大敗之 百濟與倭人皆降

 

 

당서와 일본서기, 삼국사기를 함께 놓고 그날의 전투장면을 그려보면 다음과 같다.

 

 

8월 27일 백강구에서 왜선과 조우한 당군은 인근 주류성으로 파발을 급파하여 구원군을 청했다.

문무왕은 정예 기병들을 백강구로 급파했다.

신라 정병들이 밤새 달려 백강구로 왔다.

신라군이 강 언덕에서 왜선들을 수호하던 백제정병들의 배후를 기습 공격했다.

백제군을 궤멸시킨 신라의 중무장한 기마병들이, 백사장에 포진한 왜군들의 좌우로 달려 내려오며 왜군들을 덮쳤다.

중무장한 기마병, 유리한 지형을 선점한 신라군의 날카로운 공격에,

왜군 진영의 좌우가 무너지며 중군도 혼란스러웠다.

왜병들은 신라군의 칼과 화살을 피해 배를 몰고 강으로 나아갔다.

그러나 당선(唐船)들이 왜선들을 물샐틈 없이 삼면으로 에워쌌다. 

 

 

놀이공원의 범퍼카를 타본 사람이라면 그 상황을 알 것이다.

사면은 벽이요, 좁은 공간 안에서 운행되는 범퍼카는 너무 많다.

범퍼카 놀이의 묘미는 서로 충돌하여 치고 박는 것이다.

그물망 안쪽으로 몰린 1천여 대의 왜선들. 당의 배들이 삼면에서 왜선을 향해 불화살을 날렸다.

그날 바람은 왜의 진영으로 불었다.

한 폭의 지옥도였을 것이다.

신라군의 강공을 피해 그물망 안으로 왜선들이 어지럽게 몰려나오니,

배가 서로 뒤엉켜 뱃머리를 돌릴 수 없는 지경이었고,

바람을 타고 순식간에 배 4백여 척이 화염에 휩싸였다.

왜군들은 불길을 피해 강으로 뛰어들었다.

그러나 구원은 없었다. 요행히 헤엄쳐 뭍으로 올라가더라도 신라군의 창칼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당군에 비해 워낙 수전에 능한 왜군들이다. 부여풍을 비롯해 절반의 왜선들이 그 지옥을 벗어났다.

당의 배들도 타격이 상당했을 것이다.

승패의 차이는 어느 편이 더 많이 죽었는가, 누가 먼저 꼬리를 말았는가의 차이일 뿐이다.

그러나 승자의 기록에는 죽음이 없다.

 

백강을 벗어났어도 부여풍은 주류성으로는 돌아갈 수 없었다. 이미 그곳은 신라군에게 완전 포위되어있었다.

그가 일본으로 왜 돌아가지 않았는지는 의문이다. 그의 제2의 고향이다.

부여풍은 고구려로 갔다.

고구려로 들어가 구원군을 청하여 다시 백제로 돌아올 생각을 했던 것일까.

 

전후 처리 역시 신라의 손으로 이루어졌다.

 

삼국사기 김유신열전

8월 13일…우리 군이 힘을 다해 그들을 크게 패퇴시켰다. 백제와 왜인들이 모두 항복했다.

대왕이 왜인들에게 말했다.

‘우리나라는 너희나라와 바다를 사이에 두고 지경이 나누어져있다. 일찍이 서로 다툰 바가 없이 우호와 화친으로 빙문하는 사이였다. 그런데 어찌하여 오늘에는 백제와 뜻을 함께하여 우리나라를 도모하려 하느냐.

지금 너희나라 군졸들이 모두 내 손안에 있으나 차마 죽일 수는 없다. 너희나라로 돌아가거든 이 사실을 너희 왕에게 고하거라.’

그리고는 왜인들이 알아서 가도록 했다.

 

八月十三日 至于豆率城 百濟人與倭入出陣 我軍力戰大敗之 百濟與倭人皆降 大王謂倭人曰 惟我與爾國隔海分疆 未嘗交構 但結好講和 聘問交通 何故今日與百濟同惡 以謀我國 今爾軍卒在我掌握之中 不忍殺之 爾其歸告爾王 任其所之

 

 

중국관련 사서, 일본서기에는 모두 백강구 전투에서의 신라군의 활약이 누락되어 있다.

그런데 신라본기 문무왕 11년조의 설인귀에게 보낸 답신,

‘신라가 이렇게 당을 위해 열과 성을 다했다’는 주제 하에 꾸며진 기록에

‘백강구 전투의 진실’ 이 일부 거론되었다는 것이 역설적이다.

 

주류성은 신라 5만 대병에 둘러싸여 보름을 버텼다.

그러나 백강구 전투의 패배로 투지를 잃은 백제군은 이후 열흘을 더 버티다가 9월 7일 항복했다.

풍왕의 시대가 막을 내렸다.


[신라본기 문무왕11년

주류성은 전의를 상실하고, 마침내 항복했다.

周留失膽 遂卽降下

 

 

자치통감 9월 8일.

 손인사 등이 백강에서 백제와 왜병들을 격파하고, 주류성을 뿌리뽑았다.

九月戊午 熊津道行軍總管右威衛將軍孫仁師等 破百濟餘眾及倭兵於白江 拔其周留城

 

일본서기.

‘9월 7일 백제의 주유성(州柔城)이 비로소 당에 항복했다.

日本書紀卷二七天智天皇二年 九月辛亥朔丁巳 百濟州柔城始降於唐

 

 백강구 전투와 주류성 함락의 주역은 당(唐)이 차지했다.

우리의 역사기록은 바람에 흩어져 찾을 길 없고,

교전 상대국의 기록을 살펴

‘우리역사의 진실’을 찾으려는 자체가 부질없는 기대인지로 모른다.

 

 

↓ KBS역사저널의, 기록과는 전혀 어긋난 ‘백강 전투 포진도’

     

 

 

 

――――――――――――――――

  

* 왜가 일본으로 국호를 정한 때는 문무왕 10년 670년이다.

663년의 기록에 대일본국이 나온다는 것은 편집된 가본(假本)일 것이다.

대일본국, 대당, 이런 표기들은 모두 근세 군국주의 시대의 산물이다.

 

 

日本書紀卷二七天智天皇二年(六六三)八月甲午…大日本國之救將廬原君臣率健兒萬餘 正當越海而至…我欲自往待饗白村…戊申 日本船師初至者 與大唐船師合戰 日本不利而退 大唐堅陣而守

 

* KBS 역사스페셜 등에는 백강구 전투에 왜병 27,000명이 파병된 것으로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사실은 663년 3월 신라를 치기위해 동원되었던 왜병의 수인데, 6월에 신라의 사비(沙鼻), 기노강(岐奴江) 두 성을 치고 돌아간 것으로 보인다.

무엇보다 장수들이 다르다.

왜병들을 이끌고 백강으로 온 장수는 노원군신(廬原君臣:이오하라노 기미오미)으로, 3월 출정 명단에는 그 이름이 언급되지 않는다.

 

 

 

 



( 2016년 09월 23일 02시 27분   조회:602  추천: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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