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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의자왕 이후) 백강구 전투①  
노성매

 

663년 6월 풍왕에 의해 복신이 제거되고,

2개월 후인 8월 27~28일 백강구 전투가 벌어졌다.

백제 땅에서의 왜군과 당군의 격돌이었다.

 

그 원인으로 삼국사기나 자치통감의 기록에는,

백제정국이 혼란하자,

당(唐)은 유인원의 청으로 파병을 결정했고,

풍왕(豐王)은 당병(唐兵)을 막고자, 고구려와 왜에 사신을 보내어 군사를 요청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유인원이 구원군을 요청하고 당이 파병 결정을 한 것은,

자치통감과 신당서에 의하면 662년 7월인데,

 

662년 7월…인원이 증병해줄 것을 주청하자, 치주, 청주, 내주의 병사 7천명을 징발하여 웅진으로 달려가도록 조서를 내렸다.

資治通鑑 唐紀 卷200 高宗龍朔二年(662년)

秋七月…仁願乃奏請益兵 詔發淄青萊海之兵七千人以赴熊津

 

662년 7월…백제를 치기위해 손인사를 웅진도행군총관으로 삼았다.

新唐書本紀第三

高宗龍朔二年 七月…右威衛將軍孫仁師為熊津道行軍總管 以伐百濟

 

정작 당군이 백강에 나타난 것은 1년 후인 663년 8월.

손인사가 거느린 7천이다.

 

그리고 백제에 잔류해있던 당군 1만은, 혹독한 환경 속에서 죽은 자가 적어도 절반 가까이 되었을 것이다.

 

이 숫자로 당군(唐軍)을 추켜세우기에는 모양새가 빠진다고 여겼는지,

신라본기에는 갑자기 40만으로 부풀려진다.

 

신라본기 문무왕3년.

병사를 더해줄 것을 주청하였다.

이에 조서를 내려 손인사에게 군사 40만을 거느리고…

乃請益兵 詔遣右威衛將軍孫仁師 率兵四十萬

 

40만쯤 되어야 아귀가 맞아 떨어진다고 여긴 모양인데,

파병된 7천의 당군은

상황에 ‘끼어들어 밥숟가락 올리기’ 정도의 병력이다.

 

풍왕이 고구려와 왜에 구원병을 요청할 정도까지도 아니다.

 

그런데 풍왕의 똥줄이 타고, 당과 왜가 급박하게 백제로 병력을 급파한 이유가 일본서기에 보인다.

 

663년, 천지천황 2년 8월 13일.

신라는, 백제왕이 훌륭한 장수를 죽이자 곧바로 백제로 쳐들어가 먼저 주류성을 치려고 도모했다.

이에 백제왕이 신라의 그러한 책략을 알고는 여러 장수들에게 말했다.

‘지금 들으니 일본의 구원군 장수 노원군신이 강병 1만여 명을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오고 있다고 한다.

여러 장군들은 그에 따른 전략을 논의도록 하라.

나는 직접 백촌으로 가서 그들을 맞아 접대하리라.’

日本書紀卷二七 天智天皇二年

秋八月壬午朔甲午 新羅以百濟王斬己良將 謀直入國先取州柔

於是百濟知賊所計 謂諸將曰

今聞大日本國之救將廬原君臣率健兒萬餘 正當越海而至 願諸將軍等應預圖之 我欲自往待饗白村

 

663년 6월 풍왕이 복신을 제거하자,

기다렸다는 듯 신라는 대규모 군 동원령을 내리고 백제원정을 준비했다.

신라에 백제의 간자가 없을 리 없다.

백제의 풍왕은 왜에 파병요청을 했다.

고구려 원정에 실패한 당(唐) 역시 신라의 기세를 견제하고자 개입을 결정했다.

 

문무왕의 행보는 거침없었다.

7월 17일에 이미 5만 대병과 28명의 고위 장군들을 거느리고 왕성을 출발했다.

그 소식을 접한 당과 왜병이 백제를 향해 서둘러 배에 올랐다.

8월 13일경 신라군은 풍왕(豐王)의 도성(都城) 주류성에 도착했다.

 

 

661년 6월 무열왕이 훙하고, 문무왕이 즉위했다.

문무왕은 국상중임에도 동년 7월에 전시체제로 돌입하여 장군들을 배치했고,

고구려 전을 준비하고 북상을 시작했다.

삼국사기와 당서에는,

고구려정벌을 위해 당이 신라에게 군 동원령을 내렸고,

문무왕은 국상중임에도 당의 명을 거역할 수 없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661년 6월에서 662년 2월까지의 당의 고구려원정은

처참한 패배였다.

반면 신라는 고구려원정으로 얻은 성과가 적지 않은 듯 잔치 집 분위기다.

논공행상도 거하게 치러졌다.

 

결과로 보자면,

당(唐)의 명령으로 이루어졌던 것이 아니라,

무열왕 재위 때부터 계획하고 준비하던 원정이었고,

당이 고구려 배후를 공격하여 고구려의 힘을 분산시켜준 덕분에

신라가 큰 이득을 취한 모양새다.

재주는 당(唐)이 부리고,

돈은 신라가 챙긴 듯한.

 

기마 민족들의 한병(漢兵)들을 상대하는 전술 중 하나는

깊숙이 유인하여 식량보급로와 연락망을 두절시키고,

포위와 공포, 아사(餓死)로 이어지게 하는 것이다.

소정방 역시 그 계책에 말려들어 평양 인근까지 와서

오도가도 못하는 신세가 되었다.

 

662년 1, 2월의 평양은 가혹했다.

포위와 고립으로 당군(唐軍)은 흩어지고 연락망은 두절되었다.

혹독한 추위와 배고픔, 공포가 당군을 덮쳤다.

장군들도 한 명씩 쓰러져갔다.

 

2월 갑술일. 패강도대총관 임아상이 군중(軍中)에서 죽었다.

4일 뒤 무인일. 옥저도총관 방효태가 사수(蛇水)에서 고구려군과 싸우다가 패하였고, 그의 아들 13명과 함께 모두 전사했다.

二月…甲戌 浿江道大總管任雅相薨於軍…

戊寅 左驍衛將軍白州刺史沃沮道總管龐孝泰 與高麗戰於蛇水之上 軍敗 與其子十三人皆戰死.

資治通鑑 卷200

 

소정방 역시 죽음의 그림자 앞에 서 있었다.

이를 구원한 것이 신라군이었다.

 

신라군은 661년 8월 문무왕이 직접 신라군을 이끌고 북상하면서

배후 위협이 되는 백제의 옹산성과 우술성을 궤멸시킨다.

 

그러나 10월 29일에 당(唐)의 조문사절이 오는 바람에

북상은 일시 정지되고 왕은 도성으로 돌아왔다.

문무왕은 도성에 남고,

김유신은 다시 북상을 계속하면서 12월에 고구려의 국경으로 들어섰다.

신라군은 고구려군에 대한 두려움이 많았던 모양.

김유신열전에는 그러한 병사들을 독려하는 장면이 나온다.

 

삼국사기에는 신라가 당의 위급을 구하기 위해 군량을 마련해 고구려로 출발한 것이,

신라본기에는 662년 정월로 되어있고,

김유신열전에는 661년 12월 10일로 되어있다.

국상 중임에도 당의 영(令)을 따를 수밖에 없다는 이유다.

 

러나 기록을 종합해보면,

신라의 당군을 위한 군량보급 타령은,

신라의 식량원조 덕분에 고구려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당군을 위한 붓놀림 정도로밖에 다가오지 않는다.

 

 

병사들의 하루 이동거리를 일사(一舍)라 한다.

보병의 一舍는 하루 평균 30리.

군량을 가득 실은 우마차의 하루 이동거리는 20리 안팎일 것이다.

*지금은 5리가 4㎞, 고대에는 5.6㎞

전투 병력이 먼저 동원되어 길을 안전하게 확보해놓지 않는 한 군량이 적의 수중에 떨어질 것은 자명하다.

 

신라본기에 의하면 그때 군량을 실은 수레 2천여 대가 동원되었다.

평양까지 한 달여가 걸렸으니,

수십 리에 뻗쳤을 그 엄청난 행렬의 안전 확보만으로도

고구려전에 동원된 신라군의 엄청난 성세와 무위를 짐작할 수 있다.

 

신당서에는 평양에서 포위된 소정방에 대한 어떠한 기록도 없고, 자치통감에는 간략하게 언급했다.

 

소정방이 평양에서 포위된 지 오래되었으나 항복하지 않았다.

큰 눈이 내렸다.

포위에서 풀려 회군했다.

蘇定方圍平壤久不下 會大雪解圍而還

 

 

김유신은 평양 인근에 도착하여 직접 가지 않고,

아랫사람을 시켜 소정방에게 군량과 선물을 보내주었다.

 

신라본기

2월 6일 양오에 이르렀다.

유신은 아찬 양도와 대감 인선 등을 보내어 군량을 전달하고,

아울러 정방에게 은 5천7백 푼, 머리카락 30량, 우황 19량을 선물했다.

정방은 군량을 얻자, 원정을 파하고 회군했다.

二月…六日 至陽隩 庾信遣阿湌良圖大監仁仙等致軍粮 贈定方以銀五千七百分細布三十匹頭髮三十兩牛黃十九兩 定方得軍粮便罷還…

 

김유신열전.

유신은 양오에 진영을 꾸리고,

한어에 능통한 인문, 양도와 그의 아들 군승 등을

당의 진영으로 보내어 문무왕의 어지(御旨)로 군량을 전달했다.

정방은 식량이 떨어지고 군사들은 지쳐 싸우지 못하다가,

군량을 얻자 마침내 당으로 회군했다.

庾信營楊隩 遣解漢語者仁問良圖及子軍勝等達唐營 以王旨餽軍糧 定方以食盡兵疲 不能力戰 及得糧 便廻唐

 

 

오랫동안 고구려군에 포위되어 지치고 굶주림에 허덕이던 당군은,

김유신에 의해 군량을 지원받고,

신라군의 공격으로 포위망이 뚫리자 당으로 회군했다.

웅진성에 갇혔던 유인궤의 처지와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김유신은 평양에까지 가서,

지척의 소정방조차 만나지 않고 오연히 구원만을 베풀었다.

수하를 시켜 군량과 선물을 보내준 것을 보면,

김유신의 행보가 당군(唐軍)을 위한 군량수송이 목적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신라의 고구려원정에 대한 구체적인 과정은 보이지 않고,

당을 위한 군량수송이라는 제한된 기록만 있을 뿐이다.

 

신라본기와 김유신열전의 단편적인 기록을 뜯어보자면,

신라와 당은 고구려에 양동작전을 펼쳐 평양에 도달하기로 약조한 듯하고,

그 과정 중에 당군(唐軍)의 위기를 보고받고 구원을 펼친 듯하다.

 

신라군은 회군하는 당군과는 달리 평양 인근에서 작전을 계속 진행한 듯하다.

그러나 혹독한 추위로 동사자가 속출하자, 마침내 신라로 회군했다.

 

당고종의 1차 고구려원정은,

소정방열전에도 고구려전이 누락될 정도의 대패였다.

당서(唐書)는 참담한 결과에 대해 침묵으로 일관했다.

 

유인궤열전에 보이듯 당은 신라의 눈치를 보는 형국.

신라가 백제를 치기 위해 당과 손을 잡아야했던 몇 년 전과 달리,

당이 백제와 손을 잡고 신라를 견제할 상황이 되었다.

 

 

고구려에서 회군한 신라는 곧바로 백제로 눈을 돌렸다.

 

신라가 백제에 반간계를 꽤했는지는 알지 못한다.

그러나 복신과 도침의 죽음은 신라의 공세와 그 궤를 같이 한다.

662년 3월에 백제에 신속하던 탐라국이 신라에 항복했다.

그리고 복신의 도침 살해로 이어지고,

신라는 662년 7월 이후부터 백제의 성들을 하나씩 궤멸시켜 나갔다.

지라성, 급윤성, 대산책, 사정책, 진현성, 내사지성, 거열성, 거물성, 사평성, 덕안성 등이 차례로 함락되었다.

 

그리고 663년 6월 복신이 풍왕에 의해 살해되고,

문무왕은 기다렸다는 듯

7월 17일에 28명의 고위 장군들과 5만 대병과 을 거느리고 왕성을 출발했다,

8월 13일에는 백제 도성 주류성에 도착했다.

 

그때쯤 왜군(倭軍)과 당군(唐軍)도 백강으로 들어왔다.

 

왜는 풍왕의 백제를 위해.

당은 나당연합이라는 구실로, 부여융과 동행했다.

 

신라의 대군이 왕성을 두드리고 있는데,

부여풍과 부여융 두 형제는,

왜(倭)와 당(唐)을 각각 등에 업고

백강구에서 마주한 채 서로 칼을 겨누고 있었다.

 

 

 

( 2016년 09월 16일 17시 58분   조회:5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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