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사랑방 > 바람에 새긴 역사
3.(의자왕 이후) 예식진(禰寔進)을 위하여  
노성매

 

 

부여융은 644년 의자왕 4년에 태자로 책봉되었다.

그러나 삼국사기 의자왕 20년에는 부여효가 태자로 되어있다.

 이병도 역주(譯註)에는

의자왕 4년에 태자로 책봉된 부여융은 부여효의 오기일 것이라 했다.

삼국유사에는 효가 융의 오기일 것이라 했다.

 

기록상에 보이는 의자왕의 아들은 13명.

일본서기에는 대부인(大夫人:妃) 은고(恩古)가 국정을 논단하고 충신들을 내쫓아 망국을 자초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노쇠한 의자왕, 간교에 능한 젊은 후처 은고, 교체된 태자,

좌평 임자(任子)를 통한 신라의 반간계.

파국을 향한 모든 요소들이 밥상위에 차려진 의자왕 말기였다.

 

KBS 역사스페셜 「의자왕 항복의 충격보고서, 예식진 묘비명」에서는,

예식진(禰寔進)이 웅진성에서 의자왕을 모시고 소정방에게 항복했다고 되어있다.

소정방열전의 ‘其大將禰植又將義慈來降’ 구절을 근거로,

웅진 방어의 총책임자였던 예식 장군이 의자왕을 강제로 이끌고 나와 항복했다는 것이다.

웅진으로 탈출한지 5일 만인 7월 18일이었다.

주군을 배신하고 당(唐)의 앞잡이가 되어, 의자왕을 소정방에게 넘긴 백제의 반역자로 추론하고 있다.


그러나 웅진성 함락 역시 시간문제였을 때,

예식진의 입장에서는 주군을 보호하기위한 최후의 선택일 수도 있었다.

 

삼국사기는 신당서의 재편집이다.

당이 전쟁의 모든 판세를 주도했다는 기록의 이면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전국시대의 싸움양상과 비슷한 면을 볼 수 있다.

압도적인 무력차이가 나지 않는 한,

다른 나라를 공격하기 위해서는 주변국들과 연합을 꾀하게 된다.

배후를 위한 안정장치다.

등 뒤를 급습당할 위험요소를 남기지 않기 위해서다.

                           백제를 공격하기 위해 신라가 당에 연합을 제의했고,

고구려를 치기 위해 당이 신라에 연합을 제의했다.

 

유인궤가 ‘웅진성을 떠나 신라로 가라’는 고종의 조서에도

신라로 가지 않은 것은,

가지 못할 상황과 가봐야 좋은 대접 받지 못할 거라는 자포자기의 심정이 뒤섞여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연합체의 구성이라는 것은 오월동주(吳越同舟)와 비슷하다.

 

당(唐)은 의자왕에게 은원(恩怨)이 없었다.

그러나 신라의 입장에서는 의자왕에게 반드시 받아내야 될 혈채(血債)가 있었다.

 

신라와 당, 어느 쪽이 먼저 의자왕을 확보하느냐에 따라, 의자왕이 받을 처우가 달라질 것은 극명한 상황이었다.

 

의자왕이 예식진의 인솔로 당의 소정방에게 먼저 항복하지 않고,

버티다가 신라군에게 사로잡혔다면 어떠했을까.

필경 의자왕은 곱게 죽지 못했으리라.

 

김유신을 명장(名將)으로 만들고,

무열왕으로 하여금 ‘이렇게 살 수 없다’는 투지를 불러일으키게 만든 사람은, 의자왕이라고 볼 수 있다.

 

의자왕은 집권 초기부터 신라에 지독한 공격을 퍼부었다.

대야성 전투에서 윤충(允忠)은 항복한 무열왕의 딸과 사위를 죽이고 그 시신의 머리를 잘라 의자왕에게 보냈다.

의자왕은 그 머리를 대신들이 밟고 다니는 궁궐 층계에 묻었다.

무열왕으로서는 의자왕이 악몽 그 자체였으며 불구대천의 원수였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그것이 고대의 혈채를 갚는 방식.

 

전국시대.

제(齊)의 민왕(閔王)이 연(燕)을 공격하여 연왕 쾌(噲)를 살해했다.

쾌의 아들 소왕(昭王)은 28년간 복수의 칼을 갈았다.

그리고 마침내 진(秦)․위(魏)․한(韓)․조(趙)․초(楚), 주변국들과 연합하여 제를 공격했다.

요치가 연 소왕의 복수를 대행하여,

제 민왕을 거(莒)에서 잡아, 민왕의 힘줄을 뽑고, 그 힘줄로 제민왕의 목을 감아 죽였다.

 

일본서기 천지천황 2년 6월조,

부여풍은 복신을 잡아 손바닥을 뚫어 가죽으로 묶었고,

참수하여 그 머리로 젓을 담갔다.

 

무열왕은 웅진성 함락 후 백제로 망명해있던 검일(黔日)을 붙잡아 사지를 찢어죽였다.

검일은 무열왕의 사위와 딸, 품석과 고타소의 죽음에 관여한 신라인이었다.

 

웅진성 함락을 앞두고 선택은 하나였다.

당의 진영으로 먼저 귀순해 의자왕과 그 일가의 안전을 보장받는 것.

의자왕과 그 일행이 모두 무사할 수 있었던 것은,

예식진(禰寔進)의 공이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당으로 끌려간 의자왕과 포로들은 3개월도 되지 않아,

11월 1일 조당에서 당 고종을 대면하고 그 자리에서 모두 풀려났다는 기록으로 보아,

목숨이 경각에 달려있을 때,

가장 안전한 피난처는 역설적이게도 당(唐) 진영이었다.

그 전에 아마 당과 밀약이 오갔을 것이다.

당의 입장에서도 의자왕을 먼저 확보하게 되면, 신라에게 큰소리 칠 명분이 있다.

 

그러나 의자왕은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6개월여 만에 낙양에서 그의 70여 생을 마감했다.

 

그리고 또다시 되풀이된 백제의 내란이

부여융에게는 자연스러운 귀국의 명분이 되었다.

그는 오랜 세월 백제의 태자였고,

의자왕 사후 백제의 제 일 왕위 계승권자였다.

 

그러나 황태자의 귀환은 서글프게도 당군(唐軍)과 함께였다.

 

-----------------

*『구당서』의 기록으로, 당시 장안(長安)에서 낙양(洛陽)을 오가는 일수를 계산해보니, 보통 20․21일, 길면 23일이 걸렸다.

그런데 의자왕은 장안으로 끌려가 어떻게 낙양에서 숨을 거두고,

낙양 북망산에 묻혔는지 의문으로 남지만,

후일 연구해볼 과제다.

낙양이 당의 동도(東都)가 되는 것은 그로부터 30여 년 후가 된다.


 

 

 

 

 

( 2016년 09월 12일 05시 28분   조회:502 )   
이 름    비밀번호   

  
번호 제목 작성자 조회수 작성일
불세출의 명장, 흑치상지 노성매 25 2019-04-02
37 (환국) 3.마고성에 한 동이 물을 부우니 노성매 25 2019-05-03
36 (환국) 2.그들은 왜 바이칼 호로 갔을까 노성매 26 2019-04-30
35 (환국) 1.마고의 신화 노성매 26 2019-04-28
34 8.(흑치상지) 참고목록 노성매 17 2019-04-28
33 7.(흑치상지) 신원 노성매 25 2019-04-05
32 6.(흑치상지) 죽음Ⅱ 노성매 28 2019-04-05
31 5.(흑치상지) 돌궐의 대칸(大汗), 골돌록 격퇴 노성매 200 2019-04-03
1 2 3 4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