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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의자왕 이후) 백제왕 부여풍(扶餘豐)  
노성매

 

『구당서』『신당서』 당고종 본기에는 의자왕 이후의 백제에 대해서 단 한 줄 기록되어 있을 뿐이다.

 

新唐書.

高宗 龍朔二年 九月戊午,孫仁師及百濟戰于白江,敗之.

 

663년 고종 용삭 2년 9월.

손인사(孫仁師)가 백제와 백강(白江)에서 싸웠는데, 패퇴시켰다.

 

교과서에 등재된 백제의 멸망, 부흥운동 등은 모두 소정방과 유인궤 열전의 내용을 각색한 것이다.

그 내용에 의거해 '의자왕 항복=백제멸망=당 지배체제'로 깔끔하게 정리되어 버렸다.

 

그러나 유인궤열전을  읽다보면 정리된 공식 밖의 백제를 만나게 된다.

 

자치통감(資治通鑑) 당기(唐紀) 권200. 662년 7월의 기록은 신당서 유인궤 열전을 대부분 조합한 것이다.

 

•622년 가을 7월 丁巳.

웅진도독 유인원과 대방주자사 유인궤가, 웅진의 동쪽에서 백제군을 크게 격파하고 진현성을 빼앗았다.

秋,七月,丁巳,熊津都督劉仁願、帶方州刺史劉仁軌大破百濟於熊津之東,拔真峴城。

 

•그보다 앞서 인원, 인궤 등이 웅진성에 주둔해있을 때, 상(上:高宗)이 칙서를 보냈다.

初,仁願、仁軌等屯熊津城,上與之敕書

 

•‘평양에서 회군했다. 하나의 성을 외로이 방비할 수 없으니, 진을 거두어 신라로 가라. 만약 김법민[문무왕]이 경들이 주둔할 곳을 빌려준다면 그곳에 머물고, 그가 허락하지 않는다면 바다를 건너 돌아오라‘ 는 내용에, 장졸들이 모두 서쪽(당)으로 돌아가고 싶어했다.

以「平壤軍回,一城不可獨固,宜拔就新羅。若金法敏借卿留鎮,宜且停彼;若其不須,即宜泛海還也。」將士鹹欲西歸。

 

                           •인궤가 말했다.

신하된 자는 공가(公家:唐)의 이(利)를 먼저 생각하고 죽음에 처해도 두 마음이 없어야하는데, 어찌 자신의 욕심을 먼저 품을 수 있겠는가.

 仁軌曰. 人臣徇公家之利,有死無貳,豈得先念其私.

  

•주상께서 고구려를 멸하고자, 먼저 백제를 주벌하고 병사들을 주둔시켜 지키게 하여 백제인들의 마음을 견제하고자 하셨다.

 主上欲滅高麗,故先誅百濟,留兵守之,制其心腹.

  

•비록 남은 도적들(백제군)이 사방을 에워싸고 우리를 물리치고자하지만,

병기를 다듬고 말을 배불리 먹여 그들을 불시에 들이치면 어찌 이기지 못하겠는가.

 雖餘寇充斥而守備甚嚴,宜□厲兵秣馬,擊其不意,理無不克。

  

•이기게 되면 사졸들의 마음이 안정될 것이다.

그런 후에 병사들을 나누어 험요한 곳에 의거하여 형세를 떨쳐놓고,

표를 올려 그런 사실을 알리고 다시 증병을 요청한다면 조정에서는 (백제 견제의) 성과가 있음을 알고 반드시 출병을 명하실 것이다.

既捷之後,士卒心安,然後分兵據險,開張形勢,飛表以聞,更求益兵。朝廷知其有成,必命將出師.

 

 •지금 평양으로 출정했던 군대가 회군을 했는데 웅진 역시 뿌리 뽑힌다면, 백제의 수그러든 기세가 머지않아 다시 일어날 것이니, 고구려의 적들은 언제 멸할 수 있을 것인가.

 今平壤之軍既還,熊津又拔,則百濟餘燼,不日更興,高麗逋寇,何時可滅.

 

 •또한 지금 하나의 성에 의지해 적의 중심부에 버티고 있는데, 혹 발을 잘못 움직인다면 적의 포로가 될 것이다.

신라로 들어간다하더라도 나그네 처량한 신세가 될 것이니,

이곳을 벗어난다는 것이 뜻만 같지 않고 (곤란에 처해) 후회한다해도 돌이킬 수 없다.

 且今以一城之地居敵中央,苟或動足,即為擒虜,縱入新羅,亦為羈客,脫不如意,悔不可追.

 

 •게다가 복신은 흉폭하고 잔학하니, 임금과 신하는 의심과 이간질로 서로를 무참히 죽이고 있다.

마땅히 수비를 견고히 하고 돌아가는 형세를 관망하면서 그때그때의 방편에 따라 행동을 취해야지 섣불리 움직이는 것은 불가하다.

장졸들이 모두 그의 말을 따랐다.

 況福信凶悖殘虐,君臣猜離,行相屠戮;正宜堅守觀變,乘便取之,不可動也。眾從之。

 

 •이때에 백제왕 풍과 복신 등은 인원 등이 성에 고립되어 있음에도 구원병이 오지 않자 사자를 보내어 말했다.

‘대사 등은 언제 서쪽으로 돌아가느냐. 모두 돌아간다면 보내주겠다’

 百濟王豐與福信等以仁願等孤城無援,遣使謂之曰 大使等何時西還,當遣相送.

 

 •인원과 인궤는 방비가 없음을 알고 홀연히 출격하여 지라성과 윤성, 그리고 대산책과 사정책 등을 점거하여 죽이고 노획한 것이 매우 많았다.

그리고 병사들을 나누어 그곳을 지키게 했다.

 仁願仁軌知其無備,忽出擊之,拔其支羅城及尹城、大山、沙井等柵,殺獲甚眾,分兵守之。

 

 •복신 등은 험요한 진현성에 병사를 증원하여 지키게 했다.

인궤는 그곳을 지키는 병사들이 점차 헤이해지는 것을 알고는 신라병과 함께 야음을 틈타 성 아래까지 이르러 풀줄기를 잡고 기어올랐다.

그리고 날이 밝아오자 침입하여 성을 점거했다.

그리고 마침내 신라와의 식량운송로를 뚫었다.

 福信等以真峴城險要,加兵守之。仁軌伺其稍懈,引新羅兵夜傅城下,攀草而上,比明,入據其城,遂通新羅運糧之路。

 

 •그리고 인원은 당에 증병을 주청하니 조서를 내려 치주(淄州), 청주(靑州), 내주(萊州), 해주(海州)의 병사 7천 명을 웅진으로 달려가도록 했다.

 仁願乃奏請益兵,詔發淄、青、萊、海之兵七千人以赴熊津。

 

 •복신이 권세를 마음대로 하여 백제왕 풍과 서로 시기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福信專權,與百濟王豐浸相猜忌.

 

 •복신은 병을 핑계하여 굴실(窟室)에 누워있다가 풍의 병문안을 기다렸다가 오면 그를 죽이고자 했다.

풍이 그 사실을 알고 심복들을 거느리고 복신을 습격하여 죽였다.

그리고 고구려와 왜에 사신을 보내어, 군사를 빌려 당병을 막고자 했다.

 福信稱疾,臥於窟室,欲俟豐問疾而殺之。豐知之,帥親信襲殺福信,遣使詣高麗、倭國乞師以拒唐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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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자왕 때 들어와 백제와 고구려는 우호관계를 지속적으로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한 의자왕의 외교정책은 당과 신라를 동시에 압박하여, 두 나라가 연합할 명분이 되게 했다.

 

위의 유인궤열전에서도 드러나듯 당이 원하는 것은 고구려정벌이었다. 그런데 의자왕의 친고구려정책이 당의 발목을 잡았다.

신라 태종무열왕에게는 백제 의자왕이 딸과 사위를 죽인 철천지 원수, 어떻게든 의자왕을 죽여 분을 풀고자 했다.

 

 

당에서는 고구려전에 돌입하면서 유인궤와 유인원을 백제의 화살받이로 던져놓았다.

 그런데 절체절명에 처한 그들을 구원한 것은 또다시 되풀이된 백제의 내분이었다.

 

 구당서 유인궤열전에는, 복신이 도침을 죽인 후를 이렇게 기록했다.

 

 百濟再被亂,僵屍如莽

 백제가 또다시 난을 당해, 널브러진 시신이 들을 뒤덮었다.

 

 백제의 용맹한 수많은 싸울아비들이 내분으로 허무하게 죽임을 당했다.

 

귀실복신은 의자왕의 조카로, 귀실 땅에 봉해져 부여씨에서 귀실씨가 되었다.

도침이 복신보다 장수로서 더 뛰어났다고 한다.

승세의 정점에서 복신은 그를 시기했고, 결국 도침을 살해하고 백제군의 싸울 의지를 꺾었다.

 

유인궤에게는 하늘이 준 기회였다.

백제의 내분으로 방비의 허술함을 틈타 662년 7월 신라병과 합세해 진현성을 점령하여 신라와의 군량운송로를 뚫으면서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662년 7월 이후 백제군의 사기는 내리막길이었다.

신라는 백제공격에 병력을 다시 투입했다.

백제 동쪽의 지라성, 급윤성, 대산책, 사정책, 진현성, 내사지성이 차례로 함락되었다.

663년 2월까지 거열성, 거물성, 사평성, 덕안성 등 남방의 성들이 신라군에 의해 궤멸되었다.

 

 그러나 백제의 내분은 끝나지 않았다.

663년 6월 풍왕은 복신을 제거했다. 제3자가 파놓은 함정의 전개방식이다.

도침의 피살로부터 풍왕의 복신 제거까지, 일련의 과정들을 보면 잘 짜인 반간계의 각본을 보는 듯하다.

 

충분한 내부붕괴가 이루어졌을 때 백제를 향한 신라군의 진격이 시작되었다.

김유신을 필두로 28명의 고위 장군들과 5만 대병을 거느린 문무왕의 친정이었다.

 

유인궤는 당에 증병 요청을 했다.

부여융(夫餘隆)을 앞세운 당의 개입은, 여러 정황으로 보아 신라의 힘을 견제하려는 의도가 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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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하된 자는 공가(公家)의 이(利)를 먼저 생각하고’(仁軌曰 人臣徇利公家之)

唐公家 = 唐公國

資治通鑑注 卷第二 周烈王 戊子三十六年

蘇秦說齊王曰. 齊四塞之國…三軍之良,五家之兵

〔三軍,謂三晉之軍。高誘曰:五家,即五國]

五家는 五國으로 齊가 韓,魏,趙,燕,楚의 兵과 합쳐 秦에 대항하자는 뜻이다.

 

*‘대사 등은 언제 서쪽으로 돌아가느냐’(大使等何時西還)

당시 유인원의 직책은 '대사'로 보인다.

677년 유인궤가 토번 전장으로 떠날 때 받은 직책은 조하도행군진수대사였다.

흑치상지가 돌궐 전에서 받은 직책은 신무도경략대사, 회원군경략대사였다.

 

                 

 

 

( 2016년 08월 27일 00시 49분   조회:6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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